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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정보

호랑이가 상징적인 동물이다. 1905년 5월 5일 보성전문학교로 개교했습니다. 이용익이 설립했다. 종합대학 고려대학교는 김성수가 설립했다. 서울과 세종캠퍼스를 가지고있다. 학부생은 2021년 기준으로 2만명, 대학원생은 9500명이다. 교원은 4273명이다. 815 광복 후 보성전문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1946년 보성전문학교의 건물과 부지, 교수진, 재정 등을 바탕으로 고려대학교가 4년제 대학으로 설립되었다. 초대 회장은 기성윤이었다. 고려대학교가 설립될 당시에는 정법대, 경상대, 문과대 등 3개 대학이 있었으나 현재 기준으로 보면 로스쿨, 경영대, 문과대, 정치경제대 등 3개 대학이 있다. 고려대학교는 한국전쟁 때 대구로 이전했다. 1952년 안암동으로 돌아와 수학, 화학, 생물학과, 농림학과를 신설하였다. 물론 1950년대까지는 이공계, 농업대학만 있었지만 토목, 건축, 기계공학 등 공학대학은 없었다. 한편 1960년에는 이승만의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4·18 봉사활동에 학생 대부분이 참여하였다. 박정희 정부 수립 후 1964년 대부분의 학생들이 한일 수교를 반대했고, 고려대 총장을 15년간 역임한 현민우가 1967년 정계에 입문했다. 이와 함께 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 박정희 정권과 삼성그룹에 대한 동아일보가 맹공을 퍼부었다. 1971년, 그는 석대학교를 인수하고 새로운 의과대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고려대는 박정희정부에 맞서 우석대 인수가 어려울 정도로 강했다. 박정희가 신독재를 추진한 1972년 이후 고려대 학생들은 거의 극한까지 저항했다. 당시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시위를 통해 유신 정권에 항거하였다.김상협 고려대 총장은 성명을 통해 "학생 동요에는 이유가 있다"며 "모든 교수들이 한밤중에 모여 경찰로부터 시위대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귀가한다"고 밝혔다. 1974년 동아일보 기자들은 김대중 납치사건에 항의하며 언론자유선언을 발표했다. 당시 동아일보의 반정부 발언 강도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동아일보 광고주들에게 광고지 전면 백지화를 압박하고 동아일보 사주들에게 언론인 해고를 강요했다. 당시 고려대 재학생들과 박정희 정권 사이의 긴장이 극심했다. 1975년 4월 박정희 정권의 군부가 고려대에 침입해 학생 소요를 진압했다. 그 결과 김상혜 고려대 총장은 이에 반발해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박정희 사후인 1980년 전두환이 집권하자 분위기가 바뀌었고, 현민 유진오는 국민자문위에, 남재-김상협은 국가안전보장위원회에 합류했다. 그러나 김준엽은 전두환 독재 정권에 저항함으로써 고대의 자존심을 되찾았다. 한편 고려대학교도 정부의 서울 주요 대학 지원 요청에 따라 충청남도 연기군 도치원읍 서창리에 분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설립된 조치원 분교는 조치원 캠퍼스로 이름이 바뀌었고 2008년 세종특별자치시가 설립된 뒤 세종캠퍼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어쨌든 1980년대 들어 전두환 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수업과 시험에 대한 거부감은 고대 학생들에게 흔했다. 다만 김준엽 고려대 총장은 시위대가 경찰에 체포되지 않도록 적극 보호했을 뿐 아니라 정부가 학생회 간부들을 추방해달라는 거듭된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1985년 2월 정부는 김준엽을 강제로 사임시켰다. 이후 김준엽이 사퇴하자 1985년 겨울 졸업식에서 수만 명의 학생들이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로부터 몇 년 뒤 1987년 6월 항쟁 당시 고려대 학생들은 반권위주의 민주화 투쟁의 주축이 됐다. 전두환 정권 말기에는 고등학생들이 학생 시위대를 너무 많이 차지했고, 고려대 이인영 총장이 제1차 전당대회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고려대 학생운동은 전두환 정부 말기부터 총장 직선제를 통해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활발해졌다. 1991년 의과대학이 그린란드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96년 아산과학관, 2000년 생명과학관이 완공되면서 이공계 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한편 2002년 3월 기존 운동장 부지에 지하주차장, 열람실, 각종 편의시설, 잔디공원 등을 갖춘 중앙광장이 준공되면서 국내 대학으로는 최초로 차 없는 쾌적한 캠퍼스를 조성했다. 최근 서울지하철 6호선이 개통되면서 안암역과 고다이역을 통해 등·하교할 수 있게 됐지만 학교 문화와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2003년 2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유윤대 대통령의 개혁이 화제가 되었다. 학교 내 영어 강의 수가 4%에서 34%로 늘어나면서 세계 대학 순위는 급상승했다. 다만 학교 주인을 막걸리에서 와인으로 바꾸고 캠퍼스에 쇼핑몰을 도입하는 등 무리한 개혁이 국내외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어윤대 전 총장은 이건희 삼성 회장 별세 후 일부 학생들이 고려대와 성균관대를 합병하는 방안에 반대했다고 밝혔다. 2005년 교육부는 고려대와 고려대 보건대의 합병을 승인했고 고려대 보건대는 2006년 신입생 모집을 중단했다. 2006년 고려대학교는 서울캠퍼스에 4년제 대학을 설립하였다. 고려대학교 부속 보건대학교는 현재 부속 보건대학교의 적자로 인해 2011년까지 문을 닫았다. 2007년, 경영대학을 졸업한 이명박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대부분의 동문들이 이명박 체제 하에서 총장 비호를 위해 힘을 모으면서 다른 대졸자들의 반감이 커지고 있다. 그 결과 이명박의 공직 은퇴는 한동안 고위 공직에서 배제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2017년 3월 1일부터 학칙 개정으로 기존의 안암캠퍼스가 서울캠퍼스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실제로 학교에 가본적은 없고 지나가면서 봤다. 주변에 지인들중에 교려대를 다니는 학생들 중에는 연고대라고 하면 굉장히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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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정보

독수리가 상징 동물이다. 대한민국 사립대학이다. 1885년 4월 10일 개교했다. 서울캠퍼스와 미래캠퍼스 두군데가있다. 신촌, 송도, 일산, 원주등에 위치하고있습니다. 2021년 기준으로 서울 재학생은 19,016명, 미래캠퍼스는 7,096명입니다. 1915년 설립된 조선신교학교는 1885년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뉴턴앨런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물리학과 영어교육을 바탕으로 1886년 구세파의 후신인 경신학교를 설립하였다. 해방 후 연희전문학교가 대학의 허가를 받아 연희대학교로 설립되었고, 1957년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교가 합병하여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세브란스 의과대학은 1884년 갑신정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가장 친한 친구인 민영익은 비록 갑신정변이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의 실패로 끝났지만 쿠데타 과정에서 13차례 찔렸다. 고종 황제는 독일 외교관 메렌도르프의 권유로 북한에서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알렌에게 민간 날개 치료를 맡겼다. 고종은 서양의학에 대한 사익편취에 감명을 받아 비단옷, 부채, 도자기 등을 고종에게 선물하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1885년 4월 10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이 설립되었다. 고종은 개원 12일 만에 이 병원을 '제주집'이라고 명명하였다. 하원은 "모든 생명체를 구하는 집"을 의미합니다. 하원은 북한 정부가 건축비, 운영비, 병원사업비 등 하드웨어를 지원하고, 북한장로회가 의사, 간호사, 일부 운영비 등 소프트웨어를 지원하는 공동병원이다. 1886년 3월 29일 학생 16명으로 '제주의학당'이 개교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학교육이 시작되었다. 알렌의 첫 의료교육은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양성이 목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단기간에 의사 양성이 어려워 앨런은 북장로회 선교부에 다른 의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1886년 4월 헤론은 하원에서 앨런과 함께 의사로 일했다. 또한 선교사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윌리엄 스크랜턴이 하원 운영을 도왔다. 알렌은 1887년 9월 미국 주재 대한제국공사관의 설립을 지원하기 위해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앨런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미 의학교육의 한계를 언급한 바 있다. 앨런이 귀국한 뒤 하원에서 헤론 엘라스 빈턴 등 의료선교사들이 의료활동에 참여했다. 앨런의 뒤를 이어 하원을 운영했던 헤론은 1890년 7월 외국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하원을 운영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앨런의 하원 의대 교육은 헤런이 사망할 무렵 완전히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1891년 4월 빈튼은 헤론의 후임으로 취임했지만, 빈턴과 북한 정부 사이에 큰 갈등이 있어 이 문제는 생존의 위기에 처했다. 여기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도 운영비가 많이 드는 하원을 포기하려 하고 있다. 반면 부인이 하원 의사 출신으로 하원 학교에서 기초과학과 영어를 가르친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하원이 계속 운영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언더우드 등 서울지부 선교사들은 북한의 수도 서울에서 왕립병원을 운영하는 것이 선교사와 왕실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큰 장점이라고 목회를 설득했다. Underwood는 1892년에 미국으로 가서 Oliver R.을 만났습니다. 캐나다선교교회에서 활동하던 에비슨 토론토대 의대 교수와 에비슨이 1893년 7월 한국에 왔다. Evison과 Underwood는 미국 하원을 행정부와 분리하기로 결정했다. 애비슨은 정부와 오랜 협상 끝에 1894년 9월 하원을 정부에서 북장로회 선교부로 옮겼다. 혼란스러운 정국이 청일전쟁으로 이어지고 갑오개혁을 단행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된다. 이에 따라 하원이 민간 선교 의료기관으로 독립하게 됐다. 독립 하원은 에비슨과 언더우드의 긴밀한 협력으로 운영된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이끄는 북장로회 서울지부 선교사들이 미국선교교회로부터 기금을 받아 민간 하원의 독립출마를 도왔다. 언더우드는 또한 1899년 클리블랜드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로부터 많은 기부금을 받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친한 친구가 연세대학교에 입학해서 자주 가보았다. 학교가 굉장히 크고 좋다.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대부분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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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 정보

대한민국 사립대학입니다. 1960년 4월 18일 개교하였습니다. 설립자는 테오도르 게페르트 S.J. 입니다. 재학중인 학부생은 8,275명입니다. 대학원생은 2,743명정도로 나왔습니다. 이 기준은 2020년 으로 통계낸 정보입니다.미국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를 모델로 한 서강대학교는 1970년 종합대학으로 전환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서강이라는 이름은 한강의 서쪽 지역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1980년대 한국의 경제 성장을 기념했던 서강대학교는 서강대학교에서 유래되었다. FM 슬로건은 "청춘 서강"입니다. 우리나라 서강대만의 독특한 분위기는 서강대 설립과 초기 운영사의 역사를 돌아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서강대는 근대 종교개혁의 한 축인 예수회가 16세기에 설립해 2000년 전 로마제국에서 시작된 로마 가톨릭을 기반으로 했다. 서강대는 일본 소피아대에 소속돼 있던 독일 예수회 신부 테오도르 게퍼트 신부가 세운 대학이다. 소피아대학교는 동양에서 일찍부터 근대화가 시작된 일본에 설립된 독일의 전통적인 서구식 고등교육기관이다. 덕분에 게퍼트 신부는 동양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대학 경영과 교육 경험도 많이 쌓였다. 전후 한국에 예수회 대학을 설립하고자 했던 게퍼트 신부는 천주교 교황의 뜻에 따라 서강대 설립을 주도했다. 마침내, 서강대학교는 중앙 아메리카의 위스콘신 지역에 예수회 신부에 의해 미국식으로 설립되었다. 예수회 위스콘신 지구는 현대 유럽과 미국의 과학 문명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이를 통해 미국식 엘리트 교육과 대학 경영 기술이 서강대학교로 전수되었다. 서강대 특유의 분위기는 한국 유전자의 영향으로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국내 유일의 미국 리버럴 아츠 칼리지 전통에 따라 설립된 미국 위스콘신 예수회가 1960년부터 1985년 독립 때까지 25년간 자체 학교를 운영했다. 미국은 4년제 대학이 대학과 인문대학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그 중 하나가 대학보다 작다. 다만 예수회가 경영에서 물러나 종합대학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서강대를 미국의 문과대학과 같다고 볼 수 없다. 서강대도 법학전문대학원을 유치하고 대부분의 학과에 대학원을 설립하는 등 연구중심대학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관련 전공을 제외한 학과가 24개로 다른 대학에 비해 적다. 개설된 학과들은 대부분 철학과 수학 등 역사가 길다. 시험에 전문 화학과나 통합과가 거의 없지만 좁은 선택의 단점은 복수전공과 학생디자인전공 시스템으로 보완된다. 한때 서강대의 전공시스템이 좋은 사례로 꼽히기도 했지만, 대학이 전통학과를 통폐합하고 취업률이 불투명한 통합학과를 배출하는 것은 한때 문제로 꼽혔다.서강대학교는 다른 학교에 비해 역사가 간결합니다. 국내 대학은 인수합병 역사가 한 번도 없었고, 재외동포와 학교의 이름도 설립 이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서강대는 미국 예수회 위스콘신지구가 문을 연 이후 소수 엘리트를 목표로 독자적인 학풍을 유지해 왔다. 덕분에 다른 명문대에 비해 역사가 짧지만 여전히 현재 위치에 있다. '실질적' 학교 발전을 통해 기업은 의과대학이 없어도 의과대학이 있는 다른 대학과 함께 명문대가 됐지만, 다른 대학에는 의과대학이 있는 명문대가 됐다. 서강대는 1960년 개교 이후 주요 대학에 합류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이 빨랐다. 예수회가 한국에 대학을 설립한 것은 이승만 총장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위스콘신 신부들을 통해 미국에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교수들이 당시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외국인과 유학생들로 채워졌고, 그 당시에는 한국이 생각할 수 없었던 많은 종류의 지원이 이루어졌다. 국내 최초로 장애와 상관없이 학생을 입학시킨 대학으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현대 기술이 학교를 가득 메웠다. 수세식 변기에서 메인프레임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것 같지만 국내 대학이 도입하는 것은 서강대가 처음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서강대학교는 다양한 최초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전용 공연장인 로욜라 도서관과 시청각 스튜디오, 전자컴퓨팅실 등 예수회 위스콘신지구의 후원으로 설립된 국내 최초의 대학이다. 평생지도, 복수전공, 학생디자인 시스템을 제공하는 것은 서강대가 국내 최초다. 1981년 국내 최초로 사타를 도입한 대학이기도 하다. 서강대학교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있듯 명문 대학교라고 생각한다. 주변에 지인들중에 입학한 사람들이 있는데, 대부분 정말 공부를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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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학교 정보

대한민국 사립대학교이다. 1946년 4월 25일 설립되었다. 개교는 약 두달 뒤 인 6월 27일 했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와우산로 94에 서울캠퍼스가 있다. 종로구 대학로 57에도 있다.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세종로 2639에 있다.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 387에 있다. 서울캠퍼스에는 약 12,000명정도의 재학생이 있고, 세종시에는 5,800명정도가 있다. 설립자는 이흥수이다. 홍익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건국 이념은 단군의 홍익남이다. 설립 초기에는 대형 종교집단에 부속된 선교학교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종교와 무관해졌다. 홍익만과 산학통합이라는 건국철학 아래 독립과 창조, 협력이라는 슬로건 아래 산업과 예술이 만나는 것이 목표다. 대표적인 상징은 소와 조각상의 영원한 미소입니다. 학교 정문 앞에는 서울지하철 2호선 홍대역과 6호선 상수역이 홍대 또는 홍대거리로 불리며 독특하고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서울의 대표적인 번화가로 자리 잡고 있다. 홍익인류와 산업을 교육 이념으로 삼아 국가와 인류 발전에 기여하는 주체적이고 창의적이며 협력적인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미술, 건축, 공학, 경영, 법학 등 실용 전공이 주류이며 이론보다는 실용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대학 앞 거리인 홍대거리는 서울의 3대 번화가 중 하나로 성장했고, 학교 풍경이 개방적이고 자유롭다. 체육학교라는 이미지가 강하기도 하다. 그래서 홍익대학교는 신촌의 다른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 특히 홍익대에 대한 이미지가 높은 미대생은 개인주의가 가장 강해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홍익대는 캠퍼스 앞이 시끄럽지만 캠퍼스는 조용하고 고요해 뒷산은 물론 산책하러 오는 시민들이 많다. 음악대학도 없는 음악인들과 재능 있는 학생들이 많다. 흑인 음악 동아리인 블라인드워즈와 밴드 동아리인 블랙테트라도 2020년에 입학하는 학생 수가 증가하고 있다며 뮤지컬과 실용음악 전공을 학과에 추가했다. 예술대학의 명성은 주변 문화에 영향을 미치며, 이러한 방식으로 형성된 독특한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홍문대학교와 홍익대학교가 합병한 후 홍익대학교는 문학·법률·상업·예술 등을 운영하다가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홍익미술대학교로 격하되었다. 이후 경제학과와 경영학과가 다시 생기고, 건축학과가 예술대학과 분리되고 공학부가 신설되었다.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기 위해 서울공업대학교를 인수하여 공과대학, 예술대학, 상경대학 등 3개 단과대학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후 사범대학 설립, 법학·문학(독일·프랑스), 인문·법률대학 설립, 상업경제대학 설립 등이 추진되었다. 이후 영문학부와 국문학부가 신설되고 법학부와 경제대학이 분리되며 오늘날까지 법학대학이 설립되고 있다. '산학통합'이라는 교육철학에 따르면 실용과학은 공학이 중심이고 인문사회는 경영·경제·법학이 중심이다. 순수 이과계열에는 예술과와 문과가 있지만 문과계열은 외국어과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미술계열은 디자인과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음악과 드라마를 다루는 신설된 공연예술학부도 실용음악과 뮤지컬 공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포구에 위치한 홍익공대가 충청남도 연기군으로 이전하면서 공학과 디자인, 경영학과를 신설했다. 설립 당시 이름은 산업대학으로 과학기술대학과 디자인대학으로 나뉘었다. 이후 체육학과, 게임학과, 광고홍보학과 등이 신설됐다. 서울 캠퍼스처럼, 그것은 실용학문, 특히 디자인, 비디오, 광고, 게임과 같은 미디어 관련 학과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학력에서 언급한 것처럼 홍익대 세종대가 홍익대 서울공대를 물려받아 기존 대학을 설립했기 때문에 비슷하거나 중복된 것으로 본다. 다만 2017년 지청 철수를 계기로 세종대 중복학과 명칭과 교육과정이 개정됐다. 인천, 부천과의 접근성이 좋은 학교라고 생각된다. 홍익대학교는 홍대로도 많이 불리우고 있다. 또한, 홍대 앞 거리는 굉장히 유명하다. 맛있는 음식점도 많고 젊음의 거리로 길거리 공연도 굉장히 많이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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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정보

대한민국 사립대학이다. 1918년 개교했다. 설립자는 임영신이다. 4개의 캠퍼스가 있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로 84에 위치하고있다.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서동대로 4726에위치하고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교장길 8에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장길 86-8에 위치한다. 학부생은 23,938명이다. 대학원생은 5,793명이다. 교직원은 2,523명이다. 1918년 중앙유치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임영신 박사가 대학을 인수하여 흑석동의 재단을 설립한 후 서라벌예술대학교와 적십자간호대학교를 인수하여 규모를 확장하였다. 두산그룹이 2008년부터 학교법인을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 이 대학은 한국 최고의 약과대학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뉴스 방송과 광고, 드라마, 영화, 사진학과와 같은 미디어 학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밖에도 국내 최초로 설립된 두산재단은 공인회계사(CPA) 시험에서 100명 이상의 자격요건을 배출해 2년 연속 대학별 3위를 차지했다. 부속 유치원 중문과 후문 사이의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유치원 주변에는 숲을 포함한 넓은 땅이 있습니다. 모든 선생님들은 중앙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그곳은 명문 유치원입니다. 그것은 중앙대학교 병원 바로 뒤에 위치해 있습니다. 어린이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먼 만큼 강남과 동작 지역의 노란 통학버스가 아이들을 태우러 집 주변에 서 있다. 버스와 달리 학교 간판이 없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통학버스 외에도 여의도 인근에는 노란색 카트가 여러 대 놓여 있다. 무료 국공립 초등학교와 달리, 부유한 가정의 많은 어린이들이 사립 초등학교에 다닙니다. 높은 경쟁률을 극복한 학생에게 자동으로 학교 안내문을 발송하는 공립초등학교와 달리 신입생은 신청이나 추첨으로 선발한다. 학교 부속 중학교 흑석동입니다.대학교와 가까워서 제2의료원과 학생회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1965년 설립 원래 흑석동에는 부속 고등학교와 부속 여자 고등학교가 있었으나 1997년 두 학교가 합병하여 도곡동으로 이전하였다. 그곳은 도곡역 1번 출구에서 가깝습니다. 반면, 그는 강남 8학군의 인기에 힘입어 명문 고등학교가 되었다. 최근 흑석동 주민들이 흑석뉴타운 사업과 함께 새로운 고교 신설을 요구하고 나섰다. 중앙대학교는 이공계, IT 분야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특히 정부 주도의 BK21 사업이 IT분야에 선정되는 등 성과를 거뒀다. 중앙대학교 경영경제대학원은 매년 CPA 지원자를 대거 배출하고 있으며, 2020년과 2021년에는 국내에서 세 번째로 많은 CPA 지원자를 배출하고 있다. 중앙대학교 사범대학교도 2021년 112명의 교사를 채용했다. 그것은 "정의의 피"라는 슬로건과 일치하는 과거의 주요 스포츠 학교 중 하나이다. 대표적인 것이 4·19혁명과 6·3운동이다. 이 학교의 전 특임장관인 이재오씨와 이명박 대통령의 인연은 6월 3일 시위로 시작되었다. 재단은 2018년 전체 15개 사립대의 기업 이윤을 위한 기초재산 평가에서 43.9%를 확보해 1333억원으로 9위를 차지했다. 2018년 11월 2일자 베리타스 알파 기사의 총수입 중 학비회계(즉, 학생들의 학비 및 기타 학비)가 훨씬 더 높다. 전체 예산의 50% 이상이 학교 회계에 의존하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 로스쿨 인가를 하루 앞두고 정부가 한 신문사로부터 평가 자료를 입수해 로스쿨 인원을 미리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공식 발표 당일 중앙대학교에는 30명의 학생과 50명의 학생이 있었다. 흑역사일 뿐 아니라 '예상주'라는 얘기다. 비인가 대학이 줄었지만 일부 대학만 삭감됐고, 평가에 따라 후보 대학 평가도 마쳤으나 로스쿨 순위가 달라졌다는 주장도 나온다. 어찌됐든 이번 일로 많은 동문들이 이를 갈고 있다. 그는 2009년 서울대에 이어 두 번째로 시국선언에 참여한 대학교수가 되었다. 2011년 5월 2일에는 이명박 총장이 직접 학교를 방문하여 중앙대학교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문제는 중앙대 분교 단일화가 로비를 받아왔다는 점이다. 박범훈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은 2015년 상반기 징역 3년을, 박용성 전 대통령은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2016년 11월 26일 박근혜는 즉각 사퇴하고 소규모 운동가 단체(청년 100여명)와 일부 주요 학생회 등이 주도하는 제5차 범국민행동에 참여했으며, 1000여명이 의혈기를 들고 한강을 건넜다. 결국 박근혜의 탄핵이 효력을 발휘했고, '의로운 피가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는 징크스가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사립대 6곳의 공동입학설명회에 참여하는 대학 중 하나다. 나머지 5개 대학은 고려대, 서강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한양대였다. 2015학년도에는 8만 명이 넘는 지원자가 신청했다. 또한 화학과와 신소재공학과는 논술전형 경쟁률이 155배 높다. 중앙대가 지원금만 48억 원을 벌어들였다. 2017학년도에는 81,497명이 넘는 지원자가 신청했다. 전국 4년제 대학 가운데 지원자 수가 가장 많다. 중앙대는 서울 주요 대학 중 학업성취도가 가장 높지만 논술 경쟁률이 1:55로 상당히 높다. 중앙대학교는 내가 제일 가고싶었던 학교이다. 원하는 전공학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도 멋있다. 실제로 지원했지만, 아쉽게도 떨어졌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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