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광운대학교 정보

융합의 중심 광운이 학교의 슬로건이다. 교훈은 참과 빛이다. 대한민국 사립대학으로써 1934년 5월 20일 조선무선강습소로 개교했다. 설립자는 조광운입니다. 현재 서울특별시 노원구 광운로에 위치하고있습니다. 학생은 8000명정도이고 대학원생은 1300명정도가 있습니다. 1934년 서울특별시 중구 봉년동1가 83번지에서 운영하던 남대문상공회의소에서 조광운 화훼정리교사가 발족하였다. 1899년 제물포도에서 태어난 조광운은 어린 시절부터 인천에서 기업 활동을 하면서 야학에서 근대 문화와 지식을 배웠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증권사에서 일하면서 전기제품과 라디오가 현대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1923년 귀국한 조광웅은 석유등 판매점을 열고 광전환회사를 설립하여 전기·전자제품과 라디오 수신기를 취급하였다. 특히 1920년대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으로 한국 전자기술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기술자를 막론하고 대부분이 입으로 불을 끄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광웅은 체계적인 기술 인력의 양성 필요성을 깨닫고 1934년부터 전기와 전파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 및 기술 훈련을 시작하였다. 조선무선훈련원은 일본인 기술자 마쓰바라 씨를 초청해 통신 이론과 실습을 가르쳤고 1935년 졸업생 17명을 배출했다. 1937년에는 11명의 학생을 일본 유명 제작사에 보내 보다 발전된 기술을 배우게 하였고, 우수한 졸업생을 한국광운공사 현지 지사와 지사로 파견하였다. 북한의 무선훈련원은 우수한 교사와 대규모 인턴쉽 시설, 학생 지원 등이 활발했지만 훈련소가 배출한 학생 수는 1938년 4명, 1939년 7명이었다. 이는 교육과정의 엄격한 관리 때문이지만, 당시로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전파기술 교육을 국민적 배려와 지원이 없었다면 한국인들이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교육정책의 핵심은 이른바 '단순'을 내세우는 것이었는데, 다시 말해 한국인의 주된 교육목표는 고등교육과 기술교육을 억제하고 실무능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지만 이마저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교육기관에서도 3명당 1개교 정책을 펼쳤는데, 학교 수가 너무 적어서 3면 1개교씩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한국인의 교육열이 폭발적으로 높아지면서 1940년대에 이르러서야 일반 학교가 설립되었다. 특히 일본은 비싼 과학기술 교육을 무시했지만 1920년대까지만 해도 한반도에서 고등교육기관은 경성공과대학이 유일했다. 다만 1915년 일본인 수를 3분의 1 이하로 제한한 규정과 달리 일본인 학생 수가 3분의 2 이상 증가한 1920년대 이후로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조선사의 기술교육은 일본인과 달리 초등·하위 산업교육에 국한돼 있다. 당시 기술 교육을 실시했던 기술 학교로는 고등 교육 기관인 을종 공업 전문학교, 전을종 공업학교, 공업 보충학교 등이 있었다. 을종공업학교는 일반학교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등학교에 입학하는 중급학교이며 준을종공업학교는 을종의 교육기관이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반해 산업보충학교는 구체적인 학업능력이 거의 필요하지 않은 학교이며,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주된 목적이기 때문에 학업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20년에는 을종공업학교 2개교, 준을종공업학교 3개교, 공업보충학교 17개교 등 32개교가 전국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1920년 을종공업학교를 졸업한 조선업자와 일본인은 101명, 공업보충학교는 130명에 불과했다. 1926년 현재 이들 교육기관을 통해 배출된 기술 인력은 50여 명에 불과하다. 특히 전기부서가 없어 전기전자분야 기술인력 부족이 심각하다. 일본 정부가 과학기술 교육을 무시하자 민간이 기술 인력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최소한의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사립 기술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한 것은 1925년 이후이며, 1926년 경성전기학교와 소화전기학교, 1928년 형성공업학교가 설립되었다. 일제에 의해 경성전기학교와 소화전기학교가 설립되었으나 기술 인력이 부족해 많은 조선인이 입학하였다. 1930년대부터 한국인들은 과학기술 교육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치열한 과학 운동을 전개해 왔다. 1920년대에 한국인들은 상품 장려와 국가 자본 독립의 증진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제국주의 통치 하에서는 자본을 스스로 쌓고 쌓기가 어려웠다. 특히 우리나라에 현대 과학기술 교육을 받은 기술자가 없을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근대과기교육의 확대는 도지사 집무실에만 달려 있어 국가의 독자적인 과학역량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발명학회 창립자 중 한 명인 김영관은 1932년부터 한국의 사회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발명학회에 참여시키고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시작하였다. 발명회에는 변호사, 시인, 작가, 기독교 지도자 윤치호가 참석하였으며 동아일보는 과학기술 대중화를 지지하였다. 과학의 문맹인 과학 계몽 운동을 근절하고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모두에게 알리는 것이 이 잡지의 목적이다. 특히 당시 선구적 지식인과 교육자들 사이에서는 과학적 발전과 국력을 민족자립의 토대로서 육성하는 '과학국가'라는 생각이 은밀하게 퍼지고 있었다. 1934년 2월 28일 발명학회를 주축으로 한 사회전문가 31명은 과학의 날 등 적극적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수렴해 찰스 다윈 서거일인 4월 19일 기념식과 계몽식을 갖기로 했다. 1934년 4월 19일부터 시작된 과학의 날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의 신문사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개최되었다. 그 당시, "과학의 날"이라는 슬로건은 "하나의 시험관이 세상을 움직인다"였다. 과학의 승자는 모두 승자입니다. 과학의 대중화를 촉진한다. 얼핏 보면 과학적 전능함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국가 지도자와 지식인의 과학적 민족주의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슬로건이다. 과학의 대중화는 주로 강의, 미디어, 출판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1934년 4월 19일 중앙기독청년회관에서 기념식이 열렸고 과학관, 영등포 섬유공장, 중앙실험실, 중앙전화국 등 3개의 대중과학 강좌가 열렸다. 이밖에도 이후 결성된 '과학지식보급회'가 지역 순회 강연을 열고 '과학조선'을 취득·출판하는 등 민중 계몽과 홍보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과학의 대중화와 민족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1937년 과학의 날 야외 개최를 중단하고 1938년 제5회 과학의 날 주동자를 체포하고 과학지식보급회를 해산하였다. 또한 일본발명학회 한국지부가 즉시 설립되어 친일단체로 탈바꿈하였으며 1930년대 후반부터 민족과학의 대중화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과학의 대중화는 국가 기술과 과학 국가 수립의 발상으로 이어졌고, 이는 지식인과 이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비즈니스와 교육에 관심이 많은 리더들이 체계적인 과학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는데, 이 학교 설립자인 조광웅 선생도 일제강점기 과학국가 수립 구상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오랫동안 새로운 기술문명과 지식의 힘을 느껴온 조광운은 과학기술교육 대중화에 대한 의지가 강해 북한 내 무선워크숍을 설립하게 됐다. 광운대학교 초대 이사장 겸 설립자(조선무선연수원 출신)의 이름은 조광운이다. 이 학교는 또한 광운대학교라고 이름 붙여졌다. 조광운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아 일본으로 유학하였다.난 대학에 갈 거야. 그는 유학 중에 전자 산업에 재산을 투자했고 빠르게 백만장자가 되었다. 이후 사업을 확대하고 한국에 전자 액세서리 공장을 지으며 한국과 만주 등 전자산업에서 큰 수익을 올렸다. 당시만 해도 그는 수백만 달러 상당의 기업을 경영하는 재벌이 됐다. 국가교육 발전을 고민하던 조광은 파나소닉의 전신 마쓰시타 고노스케 창업주의 조언을 듣고 동의한 조광은 1934년 조선무선훈련원을 설립했다. 가끔 차로 지나가다가 보곤 했는데, 위치가 노원쪽에 있어서 의정부쪽에서 접근성이 좋다고 생각한다.

반응형

'대학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건국대학교 정보  (0) 2022.02.21
경희대학교 정보  (0) 2022.02.20
성균관대학교 정보  (0) 2022.02.19
한양대학교 정보  (0) 2022.02.18
고려대학교 정보  (0) 2022.02.1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