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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대학교 정보

창의, 개발, 봉사라는 교훈을 가지고있다. 위대한 미래를 향한 새로운 출발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립대학입니다. 대전광역시 그리고 세정특별자치시에 위치하고있습니다. 1952년 5월 25일 충남대학으로 개교했습니다. 19대 총장은 이진숙입니다. 2021년 기준으로 학부 재학생은 17516명이며 대학원생은 4894명입니다. 충남대학교는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5월 도립 대학교로 설립되었다. 민태식 서울대 교수와 김승동 중국학자가 공동대학 설립을 계획했다. 1951년 5월 대덕군 출신의 국회의원 손진백이 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 1951년 9월 문부과학성·법학성·경상학부 3개 학과 설치를 승인하였다. 민태식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하고 충남지역 교수와 학자들이 강연을 했다. 충남대학교가 이 전시회의 기초가 되었다. 충청남도는 1951년 11월부터 충청남도 인재 양성을 위해 대학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11월 23일 시장·군수·경찰서장 회의에서 충남대학교(충남대학교)가 설립되어 이듬해 1월까지 10억 원을 조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위원장에는 이영진 충남지사가, 문화교육사회국장 겸 민간인으로, 위원장에는 시·군수가 각각 임명됐다. 대전에서는 손영도 시장이 송진백·김용성 지회장을 맡았다. 재단을 위한 모금운동은 시·군민들에게 학교에 기부할 것을 촉구했다. 도민들이 돈이 없으면 쌀을 줄 것이다. 충남석유노조가 500만원, 대전고 국민방위대가 20만원을 기부했다. 대전의 김두환, 유승로, 최병은, 윤수권, 최한영, 홍시철, 문갑동 등이 거액의 기부금을 냈다. 협의회 활동은 결실을 맺었고, 1952년 4월 10일 문화체육교육부 중앙 교육 위원회가 충남대학교 설립 인가를 의결하고 5월 25일 공식 승인하였다. 진헌식 충남지사가 설립 공식 인준을 거쳐 총장 직무대행을, 민태식 전 전쟁합동대학교 총장이 총장 직무대행을 맡았다. 충남대(충남대)는 도립대학으로 설립돼 전임 총장을 임명하지 않고 충남도지사를 겸임했다. 전쟁체제의 어려움에도 대학은 교사와 교직원이 부족해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설립 당시 문과대학, 농과대학, 공과대학 등 7개 학과의 학생 수는 1800여 명이었다. 다만 공대는 추가 지시가 있을 때까지 개교할 수 없고, 농업대는 개교 준비가 끝날 때까지 학생 모집을 중단했다. 결국 1952년 6월 7일 문·이·법 등 3대 전공에서 220명의 신입생을 모집하여 대전시청에서 역사적인 개교식을 가졌다. 8월 진헌식 대통령 권한대행이 내무부 장관으로 전보된 후 1952년 9월 9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한 성낙서 지사가 취임하였다. 성낙서 총장 권한대행은 재단법인 충남대 후원회를 설립하였으며, 사무실은 대학 사무국에 있다. 기본자산은 국채와 재단이 기부한 현금 10억원이다. 재단은 설립 후 서산시 고북면 해안 90여 개에 대한 공유수면 간척 면허를 취득하고 염전 조성에 착수하였다. 1954년 9월 27일 성락서 총장 직무대행이 도지사직에서 물러난 후 이 학교 총장 직무대행이 자동 사퇴하였다. 같은 해 12월 2일에는 민태식 예술과학대학 총장이 총장 직무대행을 맡았다. 1955년 6월 30일 반수 이상의 교수들로 구성된 교직원 회의에서 민태식 총장 직무대행이 총장으로 선출되었고, 1955년 8월 29일 초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민태식 교수는 학교가 설립된 후 전임 총장으로 임명됐다. 1954년 12월부터 1960년까지 민태식은 학교 부지를 증축하고, 학교 건물을 증축하고, 대학원을 인가하고, 도서관을 설립하고, 실험실을 증축하고, 인턴십을 하고, 교사를 충원하였다. 개교 초기에는 학교 부지와 건물 확보가 최대 과제였다. 대학 설립 초기 충남 대사동과 문화동 일대의 국유지와 도비로 매입한 땅은 34만9314평이었다. 선생님이 근처 공공건물을 빌려 가르쳐 주셨어요. 농림대학은 1952년 6월 입학시험을 치렀고, 7월 문교부의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개교하였다. 다만 교실이 없어 현재 동산중학교가 있는 충남농업기술센터의 강의를 빌렸다. 초대 총장에는 강진형 교수가 선임됐다. 농업기술학원 임시학교 건물에서 이전한 1954년 4월 첫 실험실이 완공되었으며, 1959년 12월 말 총 1,324평의 건물과 농장과 동물농장을 확보되었다. 대학 측은 보문산 17만8920평을 훈련림으로 임대해 실험농장으로 활용했다. 1954년 4월 15일에 개교 허가를 받았다. 개교 직후 건축공학과 섬유공학과 학생을 모집한 이 공대는 처음에는 실험실 일부를 교실로 사용했다. 1955년 9월 문화동에 교사의 일부가 완공되어 학교를 이전하였다. 1959년 1월 화학공학부가 추가되었다. 1959년 12월 공대 소유 토지 952평은 제1본관, 제1실험실, 가설학교 건물, 부속 공장 등이었다. 1952년 개교 당시에는 교수 32명, 현 교수 12명에 불과했으나 1959년 12월 말에는 116명, 현 교수 74명으로 늘어났다. 1952년 12월 말 14명에 불과하던 직원 수가 1960년 9월 30명으로 늘어났다. 이 도서관은 원래 문과대학 캠퍼스에 세워져 한서각 500여 권, 한서각 1000여 권, 옥천 송재덕 옥천 송재덕 교수 영어도서 200여 권, 역사학자 황의돈 교수 도서 1200여 권을 구입했다. 1956년 12월 대흥동에 도서관이 건립되었으며, 1957년 4월 충남대학교 도서관이 건립되었다. 이 건물은 연화구에 있는 지상 2층 건물로 총 공사비 4,590만 반지 규모로 도민들이 기부했다. 1957년 10월 31일 31,639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1958년 9월 18일, 그는 제2야간대학(야간대학)을 설립하여 취업이나 학업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의 기회를 넓혔다. 1959년 7월 충청남도의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여 백제 연구회가 설립되어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백제연구회 회장 겸 회장인 민태식은 김승동, 교육부 차관 김성기, 이병도, 김상기, 이홍직, 노도양, 김현기, 유원동, 황수연, 홍준을 연구원으로 선임하였다. 또한 충남대학교 가보를 발간하는 대학 신문이 창간되었고, 1959년 12월 3일 교수 논문집 1권이 발간되었다.당시 금산군과 부여군은 인삼재배 적지로 꼽혔기 때문에 농업대학들이 인삼의 특별재배와 연구를 권고했다. 당시 우리 대학이 지방대여서 충남도 재정만으로는 사업 추진이 어려웠기 때문에 행안부의 재정지원 협상에 적극 나서야 했다. 국립대는 교육부 예산에 의존하고 지방대는 행정자치부와 교육부에 의존하고 있다. 민태식은 중앙 내무부와 적극적으로 교섭하여 많은 예산을 받아 넓은 학교 부지를 매입하고 학교 건물을 확장하려고 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은 모든 한국 대학의 교권과 학생 자치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5·16 군사정부는 학교의 질서 확립을 강조했다. 지난 5월 19일 개교 9주년을 전후하여 ROTC의 1기생들이 기념식을 가졌고, 6월 12일에는 학교의 모친이 설립되었다. 11월 3일에는 학생 총궐기 및 재건 총학생회 구성식이 열렸다. 1961년 9월 1일 고등 교육 정책에 획기적인 의미를 지닌 학사 자격 고시가 공포되었다. 이 방침에 따라 1962년 1월 22일 전국 대학 졸업 예정자를 대상으로 한 학사시험이 실시되어 180명에게 수료증이 수여되었다. 한편, 1961년 8월 군정은 대학을 개편하기 위한 계획으로 대학을 개편하였다. 학점영역에 설립되는 대학과 같거나 비슷한 국공립대는 폐지한다는 원칙이 채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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