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학교 정보
민족중흥의 새역사 창조라는 창학정신을 가지고있습니다. 힘과 슬기 그리고 정성이라는 교훈을 가지고있습니다. 대한민국 사립대학교입니다. 1947년 9월 22일 대구대학으로 최준,이병철이 설립했습니다. 1950년 4월 10일 청구대학으로 설립했습니다. 최해청입니다. 이후 1967년 12월 22일 영남대학교로 통합되었습니다. 설립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입니다. 재학생은 2020년 기준 30000여명정도입니다. 대학원생은 2800여명입니다. 영남대학교는 1947년 한국의 유명한 지주인 경주 최씨의 마지막 부자인 최해천씨와 독립운동가 최준씨가 함께 설립했다. 참고로 최해진과 최준은 모두 경주 최씨 집안이다. 영남대학교는 박정희 정권 때 설립되었다. 당시 영남학원의 정관인 영남대학교 법인은 "이 법인의 목적은 박정희의 교육 이념과 정신에 입각한 교육을 하는 데 있다.난 받아 적었다. 박정희 사망으로 이 조항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박정희 창업주로 바뀌었다. 1948년 9월 최해천이 대구 종로에 야학을 개교하고 1950년 3월 부정동으로 이전하여 4월 25일 재단을 설립하고 요청대학으로 개편하였다. 경일대학교는 1955년 현재의 노보텔 부지로 이전하고 1963년 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면서 경일대학교의 전신이다. 1964년 대학 본부를 효목동으로 이전했지만 이사회는 "1967년 대학 내부·외부 여건이 복잡해 자체적으로 생존이 어려웠다"고 밝혔다. 당시 이은상 청구대학 교수는 박 전 대표에게 "같은 해 5월 5번째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거절했다"고 말했다. 그는 임기 종료 후 정원을 활용해야 한다며 이 같은 의견이 받아들여져 영남대가 탄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구대학교.조선 시대 최진립 장군의 후손인 최준은 12대에 걸쳐 재산을 모아 북한 민족권회복단과 대한독립회에 독립자금을 지원한 부농이었다. 1945년 10월 대구대학교의 전신으로 대구대학교가 설립되었고, 1947년 3월 경북대학교 예술과학부라는 임시학부가 설립되었다. 1948년 9월 대봉동 대구중학교 부지로 교사들을 이전하였고, 1951년 4월에는 청구대학교 부지로 교사들을 이전하여 향교재단에 가입하였다. 1952년 5월 남산동 향교 캠퍼스로 교사를 옮겼으나 1954년 12월 대명동 신사옥으로 이전하여 1957년 6월 본관이 완공되었다. 그러나 대구대학교는 1960년대에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기 쉬웠다. 사재 대부분을 대구대를 운영하며 보낸 박정희는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대학 재편을 계획하고 있다. 당시 최준 대구대 설립자는 "학생을 그만두거나 학과를 줄이거나 대구대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는 안내문을 받았다. 최 회장은 결국 이용익 회장이 고려대를 손병희 회장에게 넘긴 것처럼 대구대도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에게 넘어갔고, 학교의 경영권은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었다. 신현철 전 대구대 교수가 시멘트 사업 확장에 어려움을 겪던 이병철과 경주에 가서 인수를 청탁한 이병철에게 제안했다. 다만 이병철 삼성 회장이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로 물러난 지 2년 만에 현장으로 복귀하는 조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넘겨졌다. 이병철 총장은 대구대 경영권을 성균관대에, 박정희는 경주 최씨 일가→이병철 삼성그룹 회장→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각각 이양했다. 당시 경주 최씨의 고택과 선조들의 묘도 영남대학교 재단이 소유하고 있었다. 이후 영남대 재단이 선산을 팔자 경주에 있는 최씨 가족은 선산의 묘가 있는 선산을 판매가의 두 배에 사겠다고 제안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팔았다. 최태민의 사위이자 최순실의 처남인 조순제는 영남대 부동산을 헐값에 많이 판 것으로 알려졌다. 이성근 씨의 차량에 경북 1호 번호판이 붙었고, 경북지역 기관장들은 전화로 대통령에게 고개 숙여 인사해야 했다. 학교의 성장에 걸림돌은 없었습니다.이때 한강 이남 최고의 대학이라는 자부심이 들었다. 신생대학에 불과한 영남대가 당시만 해도 좋은 대학으로 꼽힌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다칭은 여전히 잘 알려져 있고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학교는 혼란에 빠졌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토지계약 조사 대상 사립대학 중 가장 규모가 작은 대학이 됐다. 이런 가운데 비수도권 대학이 충남대, 한남대, 전남대, 조선대, 부산대와 함께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1990년대 임수경 방북 등 논란이 된 운동단체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에서 총학생회가 탈퇴하면서 기존 활동가와 총학생회 사이에 분쟁이 빚어졌다. 2009년 이사회는 박근혜 회장이 추천한 4명을 포함해 7명으로 구성된 이사회로 개편되었다. 영남대는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학생들에게 부와 혜택이 많았지만 지금은 '돈 없는 학교'로 불리며 학부생들 사이에서 재정난에 빠져 있다. 일부 학생들은 "넓은 면적을 팔고 학교 재정을 확충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까지 한다. 이게 다 노석균 씨 때문이다. 노석균 사장이 물러난 뒤 김진상 국제통상부 부원장이 사장 대행을 맡았고, 2017년 서길수 사장이 사장이 됐다. 영남대학교 서길수 총장과 경북대학교가 2020년 세계 대학 영향력 평가에서 17위를 차지했다. 서길수는 2021년 박사직에서 물러났다.